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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들은 부유해지지 못하고, 가난할까요?

 

Haiti_아이티가 아주 대표적이라고 합니다.

 

<역사 흐름>

1626년 생도맹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편입_이 당시 커피와 설탕이 이 지역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생도맹그에서 생산되는 설탕은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약 40%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18세기 세네갈 지역의 노예가 생도맹그로 이동되며, 설탕 농장의 노동력을 충당하였습니다. 이 당시 지역간 이동하면서 수많은 노예들이 사망하였고, 혹은 고된 노동을 하다 사망하는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18세기 말 대략 4만명의 백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45만명의 흑인 노예가 살고 있었습니다. 약 90%가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예중 60%는 생도맹그의 원주민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노예였던것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노예는 1년 이상을 살지 못하고 대부분 병과 심한 노동착취로 인해 죽었다고 합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하고 생도맹그에서도 혁명의 꿈틀거림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791년 생도맹그 북쪽에서 흑인 노예들이 백인 지주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고,

 

1792년 프랑스의 입법의회에서 피부색에 상관없이 동등한 권리를 부여한다는 법이 제정되었고,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기로 결정하면서 노예들의 저항운동은 더 큰 힘을 얻는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흑인까지 평등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흑인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전쟁을 효율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생도맹그의 주요 핵심 인물이었는데 그는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801년 그는 스스로 생도맹그 지역에서 종신의 총독 자리에 올랐고 프랑스의 심기를 건드리게 됩니다.

 

프랑스는 그를 프랑스로 압송해 오고 그를 죽인후에 다시 생도맹그의 흑인들을 노예로 사용하려 했습니다.

 

1803년 흑인들은 생도맹그에 있는 프랑스 군을 몰아내고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높은 산의 땅"이라는 뜻의 아이티로 이름을 정했씁니다. 

 

 

 

 

 

1709년도부터 전쟁과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생도맹그의 지역은 초토화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독립후 재산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프랑스로 활동지를 옮긴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독립후 20년동안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해상을 막고 다른나라와의 교역을 방해했습니다. 또한 독립 이후 아이티에 대한 배상또한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1825년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군사적 협상으로 아이티로부터 150,000,000F 을  보상을 받아내었습니다. 이는 아이티 1년 국민소득의 약 300%였고 이를 5년안에 값으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프랑스 양아치였네요...)

아이티는 국민소득의 300%에 해당하는 금액을 5년안에 값지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기간을 늘려달라고 했고 대신 이자를 지불하였는데 그 이자는 국민총 소득의 15%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 또한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에 있는 흑인 노예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 였는데요, 미국은 프랑스가 1826년에 독립을 인정하고나서도 더 늦게 인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아이티의 주 상품은 설탕이었는데, 미국은 쿠바산 설탕을 수입하면서 아이티의 무역에 큰 지장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독립이 되었지만 주변 국가의 무역 방해 및 약탈은 끊임 없이 이루어졌고 부익부 빈익빈이 더욱더 지속되었습니다. 당연 돈이 부족할수록 인권또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죠.

 

2010년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아이티에게 또 큰 시련이 다가왔었는데, 정말 잠깐의 조사만 해봐도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이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식민지를 겪었던 나라들은 이런 피해를 겪기 때문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고, 선진국에서는 후진국을 무시하고, 피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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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이 발생하기 전>

 

중세의 교회는 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이자를 받는 행위를 비판 했었다. 왜냐하면 시간을 통해 돈을 버는 방법은 신의 소유물이라고 여겨 왔기 때문 입니다. 자연스럽게 돈을 빌려주고, 값는 행위가 억압당하니, 상업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음은 당연해 보입니다. 

 

 

<상인이 발생하는 시점>

 

시간이 흘러 12세기에 유럽 다른 각국에서 다양한 경제활동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와 독일 북부지역인데 뤼베크와 함부르크의 상인들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신의 소유물인 시간을 가지고 돈을 버는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돈을 빌려주는 것은 공공의 노동을 위함, 그리고 그 공공의 노동에 대한 대가"라고 말하며 그 논리를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상인들이 한 지역에서 풍부한 어떤 물자를 다른 그 물자가 부족한 지역에 옮겨서 공급해주지 않으면, 많은 지역에서 큰 위기가 오게 될 것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상인이 발전하는 시점>

 

그리고 이탈리아 상인들은 유럽의 최초 병원인 'Santa Maria della Scala' 을 건설합니다. 

이 처럼 상인들의 입지가 점점 증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자본을 투자하는것 외에도 예술가를 후원하거나, 기록에 대한 투자또한 아끼지 않았습니다.

 

 

 

 

14세기 프랑스 샹파뉴 지역은 중세 상인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 시장 감독소

- 관세 관리

- 상인들의 안전 관리

- 유럽의 중간 역할 

- 1년 내내 열리는 다양한 시장 

 

 

이런 지역은 당시 상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였던 안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고 이에 따라 또 다른 발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 탈세, 상인들이 세금을 안내기 위해 탈세를 하는것 입니다._ 왜냐하면 이 당시 도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물자를 옮기기 위해서는 바다를 통해 가거나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 당시 물건을 옮길 때마다 세금을 내라는 왕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다리들이 많이 생기고 도로가 많이 정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통화 문제, 지금은 유로를 통일화해서 사용하지만 그 당신 모든 돈이 달랐기 때문에 그 돈들을 다 섞어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은행 이라고 합니다. 은행은 독일어 Banc 에서 나온 단어 입니다. 이에 따라 은행이 발전하게 되고 통화가 통일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길드가 발생하게 되고, 이제, 상인들의 전쟁과 나라간의 전쟁 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먼것같지만 가까운 역사이고, 모든것이 돈으로 인해 발생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득이 되느냐 였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간 득이되느냐 실이되느냐에 따라 국제 정세가 움직이고 있는데, 이 기본 원리를 토대로 한번 생각해보면 좀 더 재미있는 세계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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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 신격호, 롯데를 세운 기업인이다.

 

1922년 태어나, 

그는 창씨개명으로 인해 시게미쓰 다케오란 이름으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언양보통 학교 졸업후 농사일을 했었다. 추후 울산 학교에 들어가 공부했고, 도축장에서 일을 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는 일본에 가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41년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향했다. 가자마자 돈을 뺐기고 구타를 당했지만 우유배달 및 잡일을 하며 버텼고, 1944년 약 3년동안 고난을 겪고, 하나미쓰라는 예전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람을 만나 첫 사업을 시작한다. 하나미쓰는 신격호에게 6만엔을 주며 공장을 해보라고 했지만, 사업시작 전 폭격을 맞아 공장을 가동도 해보지 못하고 망했다. 1945년 해방이 됬지만, 한국에 들어가도 할것이 없고, 하나미쓰에게 빌린돈을 값기위해 남아 있었다.

 

일본에서 화학과를 졸업한 신격호는 일본에 남아 비누를 만들어 팔며 사업을 시작했다. 생필품이라 일본에서 어느정도 돈을 벌었고, 이후, 풍선껌을 만들어 팔았고, 일본에 온지 8년만에 사업적으로 성공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업이 바로 롯데이다. 

 

롯데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장 인물인 샤롯데에서 따온 이름이고 소비자로부터 영원히 매력적이고 사랑받는 기업, 친숙한 제품제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추후 일본의 경제가 좋아짐에 따라 손님이 집에 찾아왔을때 초콜릿을 대접하는 문화가 나오고 있었는데, 이 당시 유럽에서 초콜릿을 만드는 사람을 초빙하여 질 좋은 초콜렛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고, 돈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초콜렛은 가나 초콜렛 이고 이 아이템으로 사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추후 한국에는 박정희 정부때 1967년 롯데제과로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격호 회장에게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대한민국에 투자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거쳐 한국 롯데를 발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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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정도전

내우외환, 홍건적이 북쪽을, 외구가 남쪽을 공격해 왔고 권문세족은 나라의 속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신진대사부라는 세력들이 나오는데, 나라를 살리자 라는 의미이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은 정도전이다. 민본주의의 사상을 통해 역성혁명을 꿈꿨다. 정도전은 머리만 있지 칼을 쓸 수는 없었다. 따라서, 칼을 쓰는 사람을 찾았는데 그 때 가장 유명한 사람들이 최영과 이성계였다.

 

하지만 최영은 권문세족 집안이었고, 이성계는 함경도 촌놈이었다. 따라서 최영은 역성혁명에 맞지 않았고, 이성계가 안성맞춤 이었다. 

 

 

좌, 최영 / 우 이성계

 

 

 

이때, 또 갈라지게 되는데,

정몽주와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지키면서 조금씩 바꿔나가자는 온건파 세력이었고

정도전과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세력이었다.

 

이런 긴장을 끈은 사람이 '이방원' 이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로서, 머리도 똑똑하고, 힘도 쎈 인물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고 싶었지만 이성계가 반대하였다. 

 

어느날 이성계가 다쳐서 누워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에 혼자 가게 되는데, 그때 이방원이 정몽주와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 때 나오는 노래가 '하여가'와 '단심가'이다.

 

이방원-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은 정몽주를 결국 죽이게 되고, 3개월 뒤 결국 이성계가 왕이되고 조선이 건국 되었다. 

 

좌 이방원>후 태종 / 우 정몽주

 

 

※ 족보 정리

 

이성계의 아들들 

 

- 한씨부인 >> 남편이 왕이되기 전에 죽음

이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이후, 1차 왕자의 난 : 민씨 (이방서를 세자책봉하여 일으킨 난) >> 정도전, 이방언, 이방서  사살

방연

 

강씨부인 >> 남편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엄청 노력함

방번

방서 ★ 세자책봉

 

강씨부인은 정도전이랑 정치적 이념이 같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u7_Q1hFI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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